본관은 안동.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아버지는 형규(衡奎)이다. 부유한 명문 출신으로 15세 때 대대로 내려오던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토지를 소작인에게 분배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1907년 고향으로 돌아와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지부를 조직하는 등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기호흥학회에 참여하는 한편 1909년 한성순보 이사를 역임하고,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조직했다. 서북학회 산하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하여 교감을 역임했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했다. 1911년 군자금 모금혐의로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의 민족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서명했다. 1919년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담했다. 같은해 8월 종래의 정의단이 임전태세의 군정부(軍政府) 조직으로 개편되자 중심인물로 활동했다. 12월 군정부가 명칭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했을 때,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했다. 이어 왕칭 현[汪淸縣] 십리평(十里坪) 산골짜기에 단기속성사관학교를 세우고 사관양성과 무기입수에 노력했다. 1920년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장백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벌였다. 10월 20~23일까지 계속된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나중소(羅仲昭)·박영희(朴英熙)·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일본군 3,0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뒤 북쪽으로 이동하여 헤이룽 강[黑龍江] 부근에 도착, 여기에 집결한 10여 개의 독립군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부총재로 취임했다. 대한독립군단은 이듬해 일본군의 보복작전을 피해 대부분 병력을 러시아 자유시로 집결시켰다. 김좌진은 자유시로 가다 북간도에 되돌아와,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을 양성하여 정규군을 강화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이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했다. 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재정비했다. 1927년 12월 석두하자(石頭河子) 총회 뒤 신민부가 군정파(軍政派)와 민정파(民政派)로 분열되자, 전쟁을 주장하는 군정파의 우두머리로서 민정파와 대립했다
문헌참조 : 다음 백과사전